점수표는 무엇을 안 할지 말해 주지 않는다

점수표는 무엇을 안 할지 말해 주지 않는다

시리즈 효용을 자르는 법 3 / 3
  1. 1스프린트는 기간이 아니라 효용을 잘라 나눈다
  2. 2배포 시점과 라이브 시점이 늘 같아야 하는 건 아니다
  3. 3점수표는 무엇을 안 할지 말해 주지 않는다
점수표는 무엇을 안 할지 말해 주지 않는다

분기 계획 회의였다. 백로그에 올라온 열두 개에 점수를 다 매겼다. 도달 수와 영향과 확신을 곱하고 드는 품으로 나누니 1위부터 12위까지 깔끔하게 떨어졌다. 한 시간이 걸렸고 아무도 반대하지 않았다.

PM: “9위 밑으로는 이번 분기에 어렵겠네요.”

개발자: “그럼 다음 분기로 넘기죠.”

회의는 그렇게 끝났고 다들 뭔가 정한 기분으로 회의실을 나왔다. 그런데 백로그에서 지워진 항목은 하나도 없었다. 다음 분기로 넘긴다는 말은 목록에서 뺀다는 말이 아니다. 12위는 12위인 채로 남아서 석 달 뒤 회의에 그대로 다시 올라온다. 순위는 점수표가 정해 줬고, 무엇을 안 할지는 아무도 정하지 않았다.

이 구별을 60년 전에 적어 둔 사람이 있다. Peter Drucker가 1967년에 낸 『The Effective Executive』 5장이다. 우선순위를 매기는 일은 쉽다. 어려운 건 무엇을 안 할지 정하고 그 결정을 지키는 것이고, 그건 분석이 아니라 용기가 정한다.

순위를 매기는 일은 쉽다

Drucker는 이 대목을 길게 설명하지 않는다. 순위를 정하는 게 일이 아니고, 그건 쉽고, 누구나 한다는 것이다. 정작 어려운 것은 그가 후순위(posteriority)라고 부른 쪽이다. 어떤 일에 손을 대지 않을지 정하고, 그 결정을 지키는 것.Peter F. Drucker, The Effective Executive: The Definitive Guide to Getting the Right Things Done, HarperBusiness, 2006(초판 1967), 5장 First Things First. 2026년 8월 3일에 원문을 열어 확인했다. The job is, however, not to set priorities. That is easy. Everybody can do it. The reason why so few executives concentrate is the difficulty of setting “posteriorities”—that is, deciding what tasks not to tackle—and of sticking to the decision.

후순위는 순위의 아래쪽이 아니다. 목록에서 빠진 것이다. 12위는 후순위가 아니라 그냥 12위고, 다음 분기 회의에서 8위로 올라올 수 있다. 이 차이가 점수표로는 안 생긴다. 숫자는 줄을 세울 뿐 목록을 지우지 않는다.

왼쪽은 점수를 매겨 줄 세운 순위이고 오른쪽은 안 하기로 한 일이다. 막대가 짧아질수록 점수가 낮다. 가장 짧은 막대도 왼쪽 칸에 그대로 남아 있고, 오른쪽 칸에는 아무것도 안 넘어갔다.

왜 오른쪽 칸이 안 채워지나. Drucker의 답은 한 문장이다. 후순위는 언제나 누군가의 1순위다. 12위를 지우자는 말은 그걸 들고 온 사람에게 하는 말이고, 그 사람은 회의실에 앉아 있다. 그래서 훨씬 편한 길이 있다. 좋은 1순위 목록을 예쁘게 적어 두고, 나머지도 조금씩은 해 보겠다고 덧붙이는 것이다. 모두가 만족한다. 다만 아무것도 끝나지 않는다.Drucker, 같은 책. Setting a posteriority is also unpleasant. Every posteriority is somebody else’s top priority. It is much easier to draw up a nice list of top priorities and then to hedge by trying to do “just a little bit” of everything else as well. This makes everybody happy. The only drawback is, of course, that nothing whatever gets done.

점수표가 이 불편함을 대신 감당해 주지는 않는다. 8위와 9위 사이에 선을 그으라고 말해 주지도 않는다. 숫자는 순서까지만 정해 주고, 어디서 끊을지는 여전히 사람이 정한다.

미룬 것은 사실 버린 것이다

후순위를 정하기가 그토록 어려운 진짜 이유는 따로 있다. 미루기가 사실은 미루기가 아니기 때문이다.

Drucker는 유능한 이들은 대개 이걸 이미 배워서 안다고 적는다. 미룬 것은 실제로는 버린 것이다. 그리고 한 번 미룬 일을 나중에 다시 집어 드는 것만큼 달갑지 않은 일도 드물다.Drucker, 같은 책. Most executives have learned that what one postpones, one actually abandons. A good many of them suspect that there is nothing less desirable than to take up later a project one has postponed when it first came up. 이어서 타이밍이 거의 틀림없이 어긋나 있고, 타이밍은 어떤 일의 성패에서든 가장 중요한 요소라고 덧붙인다.

두 해 미뤄 둔 기능을 이제 와 백로그에서 꺼내 보면 알게 된다. 그때 풀려던 문제가 이미 다른 모양이다. 그 사이에 사용자가 우회로를 하나 만들어 익숙해졌고, 붙일 자리의 코드는 두 번 갈렸고, 그때 근거로 삼았던 숫자는 아무도 다시 안 재 봤다. 꺼내 드는 순간 그건 미뤄 뒀던 그 일이 아니라 처음 보는 새 일이다.

그러니 “다음 분기로 넘기죠"는 결정을 미루는 말이 아니라 결정을 안 한 척하는 말이다. 실제로는 버렸는데 버렸다고 말하지 않았을 뿐이다.

여기서 계산이 못 하는 일이 드러난다. 점수표는 값을 비교해 준다. 그런데 버릴 각오까지 대신 해 주지는 않는다. 9위 밑을 지우는 데 필요한 건 더 정확한 숫자가 아니라, 그 사람들 앞에서 지운다고 말할 수 있느냐다.

하나를 해내면 순위표가 바뀐다

정렬이 기술이 못 되는 마지막 이유는 목록 자체에 있다.

Drucker는 우선순위와 후순위가 언제나 현실에 비추어 다시 검토되고 고쳐져야 한다고 적는다. 그러면서 이유를 하나 댄다. 우선순위에 놓인 일을 하나 해내는 것 자체가 우선순위와 후순위를 바꾼다. 그래서 유능한 이는 지금 붙잡고 있는 하나 너머로는 진짜로 약속하지 않는다. 그 하나가 끝나면 상황을 다시 보고, 그때 첫째가 된 하나를 새로 고른다.Drucker, 같은 책. Priorities and posteriorities always have to be reconsidered and revised in the light of realities. […] In fact accomplishing one’s priority tasks always changes the priorities and posteriorities themselves. The effective executive does not, in other words, truly commit himself beyond the one task he concentrates on right now. Then he reviews the situation and picks the next one task that now comes first.

1편에서 한 번에 다 만들려면 지금 다 안다고 쳐야 한다고 썼다. 우선순위는 같은 문제의 한 층 위다. 조각을 하나 만들어 봐야 다음 조각의 값을 알게 되는데, 열두 개의 순위는 아무것도 안 만들어 본 상태에서 매겨졌다.

그래서 그 순위표는 1위에 놓인 일을 끝낸 순간 이미 낡았다. 그 일을 하면서 알게 된 것이 2위와 7위의 값을 바꿔 놓았을 텐데, 표는 회의실에서 매긴 그대로 남아 있다. 목록을 정렬하는 데는 기술이 있다. 순서를 매길 때마다 목록 자체가 달라지는 상황에서 매번 새로 고르는 데는 기술이 없다.

그럼 점수표는 쓸모없나

아니다. 그리고 Drucker도 그런 말을 하지 않았다.

용기 이야기를 꺼내기 바로 앞에서 그는 우선순위 분석에 대해 할 말이 많다고 먼저 인정한다. 분석이 틀렸다는 게 아니라 가장 중요한 것이 분석이 아니라는 말이다. 이 순서를 뒤집으면 이 글은 감을 옹호하는 글이 된다.Drucker, 같은 책. A great deal could be said about the analysis of priorities. The most important thing about priorities and posteriorities is, however, not intelligent analysis but courage. 이어서 네 가지를 든다. Pick the future as against the past; Focus on opportunity rather than on problem; Choose your own direction—rather than climb on the bandwagon; and Aim high, aim for something that will make a difference, rather than for something that is “safe” and easy to do.

점수표가 실제로 하는 일은 답을 주는 게 아니라 가정을 꺼내 놓는 것이다. RICE 칸을 채우다 보면 도달 수를 3만으로 잡아 놓은 게 눈에 들어오고, 그제야 누군가 그 숫자 어디서 났느냐고 묻는다. 그 물음이 회의의 값어치다. 숫자는 판단을 대신하지 않고, 판단을 남이 반박할 수 있는 형태로 적어 둔다.

Drucker가 든 네 가지도 마찬가지다. 과거 말고 미래를 골라라, 문제 말고 기회에 집중해라, 남들이 몰려가는 쪽에 올라타지 말고 방향은 스스로 정해라, 안전하고 쉬운 일 말고 해 놓으면 뭔가 달라질 일을 겨눠라. 규칙처럼 보이지만 어느 것도 무엇을 고르라고 말하지 않는다. 어느 쪽으로 기울라고만 말한다. 이걸 짚어 두지 않으면 용기라는 말이 아무 결정에나 붙는 알리바이가 된다.

그리고 그냥 점수표가 맞는 자리도 있다. 목적이 하나로 정해진 팀, 항목끼리 서로 영향을 안 주는 백로그, 틀려도 되돌리기 싼 결정. 이 셋이 맞으면 RICE를 돌리고 위에서부터 하는 게 옳다. 이 글이 다투는 것은 그 셋이 안 맞는데도 숫자가 정해 줬다고 말하는 경우다.

마무리

순위를 매기는 일은 쉽고 안 할 일을 정하는 게 어렵다. 미뤘다는 말은 대개 버렸다는 말이고, 하나를 해내고 나면 순위표는 다시 매겨야 한다. 셋 다 더 나은 계산으로는 안 풀린다.

Drucker가 정기 점검 때 던지라고 한 질문이 하나 있다. 하고 있는 일을 놓고 이렇게 묻는다.Drucker, 같은 책, 5장 Sloughing Off Yesterday. 2026년 8월 3일에 원문을 열어 확인했다. Effective executives periodically review their work programs—and those of their associates—and ask: “If we did not already do this, would we go into it now?” And unless the answer is an unconditional “Yes,” they drop the activity or curtail it sharply.

지금 이걸 안 하고 있다면, 지금부터 시작할 것인가.

무조건 그렇다가 아니면 접거나 크게 줄인다. 이 질문이 좋은 이유는 점수를 안 매긴다는 데 있다. 순위를 하나 더 만드는 대신 목록에서 하나를 지운다. 다음 계획 회의에서 열두 개에 점수를 다 매기고 나면, 거기에 이 질문을 한 번 더 돌려 볼 만하다. 그 한 바퀴에서 처음으로 안 하기로 한 일이 생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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